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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신화

조선 개국 전 이성계의 활약상

by 준이2509 2022.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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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개국 전 이성계의 활약상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기 전에는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 궁금한 분들이 계실 것 같은데, 이와 관련하여 조선 개국 전 이성계의 활약상에 대해서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성계의 활약상

이성계는 1356년 쌍성 총 관부 수복 전쟁을 시작으로 1388년 위화도 회군에 이르기까지 30여 년을 전쟁터에서 살다시피 했지만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맹장이었습니다. 이 혁혁한 전공에 힘입어 그는 고려 조정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했습니다.

 

이성계는 쌍성 총관부를 재탈환하기 위해 침입한 나하추 부대를 격퇴시키면서 장수로서의 능력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쌍성 총관부를 빼앗긴 원은 여진족 장수 나하추로 하여금 고려를 칠 것을 요청했고, 나하추는 1362년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지금의 함경남도 지역인 삼살(북청)과 홀면(홍원) 일대를 침범합니다. 이에 고려는 동북면도지휘사 정휘를 내세워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를 거듭하게 되고, 고려는 이성계를 동북면 병마사로 임명하여 나하추와 대적하게 합니다.

 

2월에 남침을 감행한 나하추 부대가 고려 땅을 공략한 지 이미 5개월이 지나, 때는 여름의 막바지를 향해 치달리던 7월이 되었고, 나하추의 주력부대는 홍원 달단동에 주둔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들은 그동안 승전을 결과로 군사의 수가 두배로 늘어났고 사기도 한층 고조되어 있던 터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나하추는 휘하 지휘관에게 군사 1천을 내주면서 이성계 부대와 맞서게 하였는데, 나하추는 계속되는 승전에 도취되어 이성계 부대를 얕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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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결과는 나하추 부대의 대패였고, 나하추의 선봉 부대는 이성계 부대에 쫓기다가 거의 섬멸되다시피 했으며, 이에 격분한 나하추는 진영을 덕산동을 전진 배치하여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할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하지만 이성계는 먼저 야음을 틈타 나하추의 주력 부대를 기습하고, 이 기습으로 나하추는 다시 달단동으로 후퇴했지만 이성계는 고삐를 늦추지 않고 맹공을 가해 잔병들을 거의 섬멸해 버립니다. 

 

이 전투로 나하추는 수하 몇 명과 함께 겨우 목숨만을 건져 심양으로 되돌아갔으며, 그 이후 세력이 약화되어 명의 주원장에게 투항하게 됩니다. 

 

이성계의 활약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나하추를 격퇴시킨 후에도 약 30년 가까이 전장을 누볐으며, 그때마다 승리를 거두어 고려 최고의 장수로 맹위를 떨칩니다.

 

1364년(공민왕 13년), 원의 순종은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새 고려왕으로 지명하여 최유, 김용 등 덕흥군 일파에게 군사 1만을 내주고 고려를 치게 하였습니다. 공민왕은 일단 사신을 보내어 순종의 군사들을 회유하려 했으나 기철의 누이인 기황으로 인해 실패하고, 따라서 고려 왕실과 덕흥군 부대의 무력 전이 불가피하게 됩니다.

 

 

 

첫 전투는 의주에서 벌어졌는데, 의주성을 지키고 있던 사람은 안우경이었으며, 그는 처음에는 최유 부대의 공략을 잘 막아냈지만 지원 부족으로 패전하고 안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의주가 함락되자 고려는 최영을 급파하여 안주를 중심으로 전열을 가다듬었으며, 이성계에게 정예 군사 1천을 내주어 최영과 합동작전을 펴게 하여 덕흥군의 선발 부대를 대파하게 됩니다.

 

최영과 이성계는 다시 덕흥군의 주력 부대를 공략해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이 전투에서 이성계가 적장을 활로 쏴 말에서 떨어뜨림으로써 중앙 돌파에 성공한 것이 승전의 기반으로 작용하게 되는데, 이성계의 중앙 돌파는 덕흥군 부대의 전열을 뒤흔들어놓았고 최영은 좌우로 흩어진 적군을 공략합니다. 

 

고려의 이와 같은 전술에 말려든 덕흥군 부대는 거의 섬멸당하고 덕흥군은 간신히 목숨만 부지한 채 원으로 달아나게 됩니다.

 

1369년과 1370년에 걸쳐 이성계는 공민왕의 명을 받아 만주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동녕부를 공격하였으며, 1376년(우왕 2년)에는 왜구에 의해 충청도 공주가 함락되고 개경이 위협을 받자 군사를 남으로 몰아 왜구 토벌에 나섭니다.

 

일본은 14세기 당시 호죠 정권이 몰락하고 사무라이 군벌이 들어서면서 내분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이러한 내분으로 국가의 기강이 문란해지자 일본의 영주들은 공공연히 인접 국가와 상인들에 대해 침탈을 자행하고 있었으며, 이들을 통칭하여 왜구라고 했습니다.

 

이성계는 1377년을 전후하여 고려에 창궐하고 있던 왜구를 경상도, 전라도 일대와 지리산에서 크게 물리쳤으며, 1380년에는 소년 장수 아기 바투가 이끄는 왜구를 운봉에서 섬멸합니다. 이 전투를 흔히 황산대첩이라고 부르는데, 최무선이 화약과 화통을 응용한 포를 등장시킨 것이 이때라고 합니다.

 

1382년 여진의 호바투가 동북면 일대에서 노략질을 일삼자 이성계는 동북면 지휘사가 되어 다시 북으로 올라가 이들을 격퇴했으며, 1385년에는 함주로 쳐들어온 왜구를 섬멸시킵니다.

 

이성계는 승전할 때마다 위치가 올라갔는데, 1362년 동북면 병마사가 된 이후 같은 해에 밀직부사에 제수되고, 1382년에는 동북면도지휘사, 1384년에는 동북면 도원수문하찬성사가 되었으며, 1388년에는 수상 격인 문하시중 바로 아래인 수(守) 문하시중이 되었습니다.

 

이상으로 조선 개국 전 이성계의 활약상에 대하여 알려드렸는데, 방송에서 보던 역사극의 내용보다 더 엄청난 활약을 한 이성계에 대해서 다시 한번 놀라셨을 것으로 예상해보며, 이성계에 대해서 궁금하셨던 분들에게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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